[충북 청주] 청주의 중심에 있는 국보: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청주시립미술관의 김복진과 한국 근현대 조각가들 전시를 보고, 성안길이라는 청주의 중심부에 왔다.
성안길을 지나가던 중 청주를 대표하는 문화재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을 만났다.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만들었으나, 20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30개면 훨씬 높았다는 뜻인데, 엄청 높다. 전체 높이는 13m다. 또 철통은 원래 비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채워졌다고 한다. 국보 제41호이다.

아래에서 세 번째 철통에는 글씨가 적혀있다. 고려 광종 13년(962년)에 김희일(金希一)을 비롯한 김 씨, 손 씨, 경 씨, 한 씨 등 청주의 호족들이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건립 연도가 정확히 밝혀진 당간은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이 유일하다고 한다. 준풍 3년(峻豊三年)이라는 광종의 연호도 확인할 수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 기(한국사데이터베이스)
龍頭寺鐵幢記
前翰林學生金遠撰兼書, 鐫者孫鈍.
早聆幢竿所制, 餝佛門之玉標, 幡盖由來, 粧寶殿之神旆. 其狀也, 鶴翔碧落, 龍躍靑霄, 立之者旁發信心, 望之者必傾丹愿, 固知伏魔鐵杖, 拂賊霓旌.
頃有堂大等金芮宗者也, 州里豪家, 鄕閭冠族. 偶因染疾, 忽約佛天, 仰祈則敬造鐵幢, 俯誓則莊嚴玉刹. 然而難停逝水, 易沒黃泉, 已間數歲遲延, 隔時容易. 於是從兄堂大等正朝賜丹銀魚袋, 金希一等, 彼爲還願, 此繼頹綱. 遂令鑄成三十段之鐵筒, 連立六十尺之幢柱, 穿雲捧日, 貫霧倚空, 魯氏雲梯, 難攀龍盖, 甘寧錦纜, 未敵璅繩. 可謂奉往心深, 興亡情切, 植金剛之不朽, 營玉刹之無窮.
僕者膠柱頑流, 尅舟膚物, 忽蒙勸我, 聊表短章.
其詞,
幢竿始立, 天半可及,
巧成物像, 莊嚴佛法.
兄弟兩家, 合脩善業,
鑄之植之, 无窮永劫.
當寺令釋紬大德,
檀越兼令金希一正朝, 金守▨▨▨, 金釋希▨▨, 金寬謙大等, 監司上和尙信學▨▨, 前侍郎孫熙大ホ, 前兵部卿慶柱洪大ホ, 學院卿韓明寔柰末, 前司倉慶奇俊大舍, 學院郎中孫仁謙, 鑄大▨▨.
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
조금 더 자세히 보자. 용두사지 철당간의 당간기는 당시 사회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고대사 연구자들은 청주 김 씨를 서원소경의 설치와 함께 경주에서 사민 된 진골귀족의 후예로 생각한다. 따라서 청주 김 씨가 청주에 이주해 와서도 여전히 지배층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재지화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세력기반을 형성하였다. 신라 말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때에는 청주지방을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대등, 나마, 대사 등 신라의 관등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을 만든 김희일도 재지세력화한 호족임과 철당간을 만든 것이 고려 광종 때임을 생각한다면, 고려 초기에도 신라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엄청 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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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b.history.go.kr/KOREA/item/gskoDetail.do?searchType=gsko_003&searchGubun=&page=3&limit=10&sort=LEVEL_ID&dir=ASC&levelId=gsko_003_0280


한편 청주의 옛 이름인 주성(舟城)과 관련한 설화가 있다. 청주에 홍수가 자주 일어났는데, 한 점술사가 말하길, 청주의 지형이 떠내려가는 배와 같아서 그런 거라고 말하며, 중심에 배의 돛대를 세우면 재난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청주의 중심인 용두사에 철당간을 세우니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소문이다.

당간지주도 잘 남아있다.

도심 한가운데에 국보가 있다니. 청주시는 역시 문화의 도시다.

철당간 덕분에 청주 시내 중심에 광장이 생겼다. 청주 시의 여러 행사를 이곳에서 한다고 하니, 청주의 역사를 다 지켜본 것이다. 앞으로도 잘 보존되길 바란다.
2023년 1월 3일에 다녀온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글을 마칩니다.
모든 항목은 직접 지불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01.19. / 빈빈뱅 올림